로카인양구의 일본 유학기 - 2. 한일이공계국비유학시험

2024. 11. 10. 21:15일본 유학 후기/로카인양구의 일본 유학기

1편 '유학을 가게 된 이유'를 이어서 2편 '한일이공계국비유학시험'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한일이공계국비유학시험에 대한 간단한 소개, 시험을 준비한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써보려고 한다.

 

'한일이공계국비유학시험'이란?

한일이공계국비유학시험은 말 그대로 한일이공계국비유학생을 뽑는 시험이었다. (참고로 지금은 제도가 바뀌어 학부 유학생은 뽑지 않는다.) 합격자 100명과 예비 합격자 20명을 뽑는다. 예비 합격자는 합격자 중에서 포기하는 사람이 나오면 순번이 돌아가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험과 내신점수 순위로 갈 대학도 사실상 정해진다. 1등부터 5등까지가 도쿄대, 그 뒤가 도쿄공업대학과 교토대 등등 순으로 정해졌다. 내 목표는 5등 안에 드는 것이었다.

 

시험 과목은 수학, 물리, 화학, 영어였다. 단 4과목과 내신점수가 같이 들어가서 합격자가 결정된다. 원래는 시험점수만으로 결정되었다는데, 내가 시험 볼 때부터 내신 점수도 반영되었었다. 조금 공부를 잘했던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에게는 조금 불리했던 변화였다.

 

시험은 보통 7월 말에 실시되었다. 사실상 3월달부터 준비를 시작한 나에게는 4개월 정도밖에 없었다. 보통 고2부터 준비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면, 불리하다고는 느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돈 걱정 없이 고등교육을 받아보고 싶었으니까.

 

 

시험을 준비한 과정

3월 부터 일공학원이라는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했다. 시설도 열약한 편이었고, 학원비는 비싼 편이었지만 따로 방법은 없었다. 여기 말고는 시험에 대한 준비자료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말했듯이 학원비가 많이 비쌌다. 주말반이 월 80만 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기에 보충 수업을 들으면 추가 비용을 내야 했다. 그래서 부모님께 많이 죄송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반드시 좋은 성적을 내야 했고, 열심히 공부했다.

 

고2까지는 매일 10시에 잤다. 하지만 시험준비를 시작하고는 12시에 잘 때도 많았다. 그리고 기상시간은 항상 6시였다. 6시부터 12시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공부했다.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래도 고생했었다. 일본 고등학교 화학은 한국과 다른 점도 많은데 그것을 4개월 만에 익숙해지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최선을 다했다.

 

일공학원은 교대역 주변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경기 남부의 어느 물 많은 지방에 살았다. 지금은 신분당선이 생겨서 서로 오가는데 30분 정도도 걸리지 않지만, 당시에는 지하철과 버스로 2시간 넘게 걸렸었다. 그 시간이 아까웠기에 이동하면서도 공부했다. '버스 안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다.'라는 당시의 내 원칙에 따라서 그저 풍경만 바라보았던 버스에서의 시간이 유일한 쉬는 시간이었다. 가끔씩은 부모님이 데리러 오시기도 하셨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 감사할 따름이다.

 

아무튼 시간을 흘러갔고, 어느덧 시험 당일이 왔다.

 

 

시험 당일 : 수학에서 큰 점수를 날려먹다

시험 당일에 부모님이 차로 시험장까지 태워다 주셨다. 입실하고, 시험이 시작되었다. 열심히 시험을 봤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학에서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수학과 물리는 항상 나에게 점수를 주는 과목이었다. 수능 모의고사에서도 만점이 아닐 때보다 만점일 때가 많았다. 이번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내기 위해서는 두 과목에서 꼭 만점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러지 못하게 된다.

 

수학 시험에서 한 가지 복잡한 계산 문제가 나왔다. 복잡한 계산 문제라도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에 풀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런데 그때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로는 시험시간 도중에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었지만 그때는 몰랐다. 화장실 급한 마음에 집중이 될 리 없었고, 나는 검산을 제대로 못하고 답안을 제출하게 된다. 나중에 채점해 보니 틀렸었다.

 

시험을 끝나고 한동안 그 문제를 틀렸다는 사실에 매우 슬퍼했다. 그리고 불안해하며 결과를 기다린다. 안타깝게도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한일이공계국비유학시험 결과

9월 중순에 결과를 알려주는 메일이 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메일을 열었다. 

 

 

결과는 30등대 중반의 성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4개월 준비한 것 치고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충격을 받으면 주변이 노란색으로 변한다는 것을 그때 유일하게 경험했었다. 

 

내가 조금 더 빨리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면, 수학시간에 그 문제를 더 잘 풀었더라면, 조금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 하고 수없이 많은 후회를 했다. 정말 많이 후회했고 반성했었다. 부모님께도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몇 주간 결과를 말씀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은 실전이었다. 그렇게 후회한다고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저 받아들여야 했다. 내 성적이라면 일본 지방의 국립대학교에 갈 수 있었다. 나는 한국 입시를 제대로 준비할지, 아니면 이 결과를 그저 받아들일지 결정해야 했다. 집안 사정상 재수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며칠간 고민을 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일본에 유학 가기로 했다. 한국 대학교의 학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결정을 내리고 부모님께도 결과를 말씀드렸다. 의외로 부모님은 기뻐하셨다. 내가 작성한 원서와 부모님의 동의서를 받아서 제출했다.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과는 별도로 한에 가까운 아쉬움이 많이 많았다. 나중에 대학교 입학해서 미친 듯이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식에 학생표창을 받기도 하고 JLPT N1에서 만점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공부했던 것은 입시 결과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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