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카인양구의 입대 전 소감과 논산 훈련소 후기

2022. 10. 12. 00:02군대/군대 후기

이번 글에서는 입대 전부터 훈련소 수료까지의 후기를 쓰려고 한다.

1. 입대 전

사실 나는 입대할 때 별 생각이 없었다. 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와서 입대했었다. 한국에 귀국하기 전에 졸업논문과 외국생활 정리 문제로 몇 달간 많이 바빴기 때문에 약간 지쳐있었다. 그냥 조금 쉬면서 인생의 큰 숙제를 푼다는 생각으로 군대에 갔다.

입대하면서 딱 두 개의 목표를 잡았다. 첫 번째는 다치지 않고 전역하기였고, 두 번째는 군대에서 최대한 공부해서 밖에 있는 친구들과의 격차를 늘리지 않는 것이었다.

 


2. 논산 훈련소 후기

나는 코로나 격리가 있어서 오히려 힘들었다. 처음 2주 동안 훈련소에서 화장실을 무조건 한 번에 한 명만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25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작 두 개의 화장실을 그렇게 이용하다 보니 화장실 갈 기회가 많이 없었다. 하루에 많아야 3번밖에 갈 수 없었다. 5시간 넘게 오줌을 참은 적도 있다. 많이 힘든 일이었다. 왜 꼭 화장실을 한 명씩 이용하게만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또한 훈련소 입소 후에 1주일 동안 손도 못 씻게 했다. 용변을 보고도 손을 씻지 못했고, 그 손으로 밥을 먹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견뎌내었을까 싶다. 그래도 그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서 그냥 열심히 먹었다. 나중에 훈련소 동기가 말해주었는데, 내가 밥을 잘 먹는 것 보고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했었다. 손도 못 씻는 판국이니 양치도 못했다. 3일 정도 지나니 견디다 못한 친구 한 명이 페트병 생수로 양치하기 시작했고 모두 그렇게 했다. 생수 250mL면 양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샤워도 일주일 정도 못했다. 코로나 격리가 풀리고 첫 샤워를 할 때의 기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정말 좋았다.


훈련은 힘든 것이 많았다. 훈련소에서 쓰는 요대가 정말 불편하고 아팠다. 어찌어찌 참으면서 사격연습을 하곤 했다. 훈련소 동기들은 처음 보는 유형이 많았다. 그래도 절반 이상이 착하고 좋았다. 재미있는 사람들도 많아서 즐겁게 보냈었다.

틈틈이 중국어 단어를 외우곤 했다. 그때는 HSK 6급을 응시할 계획이 있기도 했고, 가지고 들어간 책이 중국어 단어장 말고는 없었다. 훈련소에 책이 있기는 하지만 코로나 방지 대책으로 몇 주간 책자에 있는 책을 손대지 못하게 했었다. 그래서 중국어 단어장을 몇 번 반복해서 외었었다. 책자의 책을 볼 수 있게 된 후로는 책도 4권 정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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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소는 밥양도 적었다. 그래서 매일 배고팠었다. 나중에 PX를 일주일에 한두 번 이용하게 해 주었는데 그때부터 과자를 사 먹으며 배를 채웠다.

 

훈련소에서 유일하게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은 전화였다. 입대하고 2주 정도 지나고 처음 가족들과 통하했을 때 느꼈던 감동은 아직도 남아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이토록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구나 하면서 감사했다. 하지만 전화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보통 한 번에 3분에서 5분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전화요금은 매우 비쌌다. 전화를 3분하는데 전화요금이 천 원이었다. 전화기 버튼을 이용하여 로그인을 하면 싸게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로그인하는데 보통 1~2분 정도 든다. 그리고 버튼 하나 잘못 눌러서 로그인에 실패하면 전화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그래서 울자 겨자 먹기로 그냥 천 원 내고 통화할 수밖에 없다. 훈련병들 모두 불만이 많았지만 참고 쓸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어찌어찌 버티다 보니 행군까지 끝나고 자대 배치를 기다리는 순간이 왔다. 나는 전산 모집병이어서 당연히 후반기 교육을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강원도 양구에 있는 21사단에 배치되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났다. 앞이 컴컴해졌었다. 살면서 진심으로 운 적이 많이 없는데 그때는 정말 진심으로 울었다.

훈련소 수료식 때, 이등병 계급장을 받고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등병도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닌데 그때는 그랬다. 사실 군대 간 사람들은 다 그랬을 것이다. 수료식 날 밤에 조교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다. 조교들이 속마음을 말해주는 좋은 시간들이었다.

 


다음날에 우리는 각자 자대로 이동하였다. 강원도 양구 등으로 멀리 떠나는 사람들이 밥도 일찍 먹고 먼저 출발한다고 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설거지나 배식 안내 등을 했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잔반 처리 안내를 하고 있던 훈련소 동기 두 명이 인사를 했다. 그중 한 명이 두 손을 잡으면서 "형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많이 감사했어요."라고 말했었다. 나도 고맙다고는 말했지만 왜 지금 이렇게 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 다시 작별인사를 할 시간을 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았다. 훈련을 받으면서 동기애를 무척이나 강조한 집단이었지만 막상 헤어질 때 작별인사 하나 제대로 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뭔가 모순적이다 못해서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 훈련소 동기와 다시 인사하지 못한 채 무거운 더플백을 매고 연무역으로 출발했다.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는 동기들을 보고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연무역까지는 멀고 더플백은 무거웠다. 개인적으로는 행군보다 더 힘들었다.

연무역에 도착하여 각자 자대 위치에 따라서 타야 할 기차 칸이 정해졌다. 도시락을 하나씩 받은 다음에 오랫동안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기차가 왔다. 그동안 정들었던 조교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기차에 탔다. 기차는 출발했다. 교관들과 조교들이 다들 응원 현수막을 펼치고 있었다. 26 연대의 응원 현수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두지 마라.' 아직도 기억에 남는 문장이다. 아무튼 내가 탄 기차는 천천히 논산역에서 멀어져 갔고 서울을 거쳐서 춘천역에 도착하였다. 서울을 지나갈 때 오랜만에 보는 서울 풍경이 정말 좋았다. 논산훈련소에서 나온 사람은 알 것이다. 통곡의 다리를 건너며 고속도로 지나가는 차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런데 서울 풍경이 보이니 정말 좋았다. 옆 라인에 지하철 타고 가는 시민들이 보였다. 나도 1년 반만 버터면 저기로 다시 돌아가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수송병이 커튼을 다 내리라고 했다. 그래서 서울 풍경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마 군 인권문제가 대두되던 시기에 훈련병이 빽빽이 앉아있는 기차 안을 보여주기 싫었나 보다. 춘천역에 도착했다. 21사단 보충중대에서 우리를 데려갔다.


21사단 마크
21사단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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